이정용, 투수가 되고 싶습니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지금의 ‘나’는 필연의 연속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우연이 겹치고 또 겹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뒤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마치 신의 섭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인간의 착각일 뿐, 다시 말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우연이 쌓이고 쌓인 것일 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수많은 우연이 필연처럼 느껴지도록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악착같이 잡아야 한다.
이정용은 성남고 시절에 투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입학 당시 키가 160이 안돼 감독님이 키가 크면 투수하자고 말렸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키가 175가 되면서 투수가 되었으나 3학년 때 프로 진출이나 대학 진학을 위해 다소 무리하게 준비하다가 팔꿈치 피로 골절 판정을 받습니다. 시작부터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프로와 대학 어디에서도 컨택이 없어서 이정용과 부모님이 군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것을 감독님이 만류했고 결국 동아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정용, 동아대에서 출발해 전국구로 거듭나다
이 글을 쓰는 철투쌤은 부산이 이제는 고향 같지만, 수도권 출신 이정용에게 부산은 유배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동아대 이재헌 감독이 팔꿈치 수술을 한 이정용을 잘 관리했고 3학년 때는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고,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야구 대표팀에 선발됩니다. 성적에 아쉬움을 느낀 이정용이 증량에 돌입하고 4학년 때 키가 186에 체중은 85를 찍으면서 2018년 대학 야구를 속된 말로 씹어먹습니다. 그리고 서울 3개 구단 스카우트들의 눈에 들어 6월 말 2019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에서 엘지 트윈스에 지명됩니다. 사이드암 투수 정우영이 2라운드에 지명되었으니 이정용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정용, 프로에서도 시련은 계속된다
19시즌에 스프링 캠프 도중에 팔꿈치 불편함을 호소하더니 4월에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시즌이 끝났습니다. 20시즌 7월에 드디어 1군 엔트리 등록, 1군 등판 2이닝 동안 20구를 던지며 2피안타 1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34경기 34이닝 평균자책 3.71 3승 4홀드를 기록했으니 준수한 기록입니다.
21시즌은 이정용의 첫 전 경기 출장 시즌으로 직구 구속을 146.8까지 끌어올렸고, 김대유, 정우영과 함께 불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당시 이정용은 류지현의 마당쇠였는데 아직 김진성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라 궂은일은 이정용이 해야 했습니다. 4월, 5월에 이러구러 불을 지르는 경기가 많았지만 안정세에 들었고, 시즌 최종 성적은 66경기 69와 2/3이닝 3승 3패 15홀드 2.97 평균자책이었습니다.
22시즌에 연봉 1억을 뚫었고,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활약하며 꾸역꾸역 잘 막더니 5월 말부터 좀 이상 현상을 보이다가 7월 말까지 계투로서 5 세이브 실패를 기록했기 때문에 감독이 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3차전에 앞선 상황에 등판해 연속타자로 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시즌 후 군에 입대하려고 했으나 구단이 만류했는데 23년에 아시안게임이 있기 때문에 병역 혜택을 구단 차원에서 노리는 모양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23시즌 초반에 이정용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발탁되기에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23시즌 초반 젊은 불펜들의 기록이 이정용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정용, 너무 던져서 조정이 필요하다
대망의 23시즌이 밝았습니다. 엘지 트윈스는 지난 2년간 불펜의 활약으로 짠물 야구를 해왔고, 그게 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년간 우승에 근접했던 팀을 우승시키지 못한 감독이 떠나고 우승청부사 감독이 왔고,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이 팀이 원래 타격의 팀이었나 싶을 정도였고, 지난 2~3년간 불펜을 책임지고 이끌었던 정우영, 이정용, 고우석이 계속 게임을 터뜨렸습니다. 정우영은 사이드암 특유의 슬라이드 스텝으로 인해 도루 허용이 많았는데 그것을 고치려다가 공이 밋밋해졌고, 몰리고 정타 맞기를 반복했습니다. 고우석은 대표팀과 악연인지, 이번에는 WBC에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공 하나 못 던지고 욕만 먹고 돌아오더니 전반기 내내 골골거렸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 이정용은 대표팀에도 가지 않았는데 그랬습니다. 지난 몇 년간 많이 던진 원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팀은 돌아갔는데 기존 필승조가 골골하는 사이에 고졸 박명근, 대졸 유영찬, 부활 함덕주까지, 세 명의 새 얼굴들이 이들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했습니다. 그 사이 정우영은 2군에 조정하러 갔고, 고우석은 부상 회복에 전념했고, 이정용은 선발로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이정용, 위기의 순간에 선발이 되어 나타난 사나이
엘지 트윈스는 한국인 선발이 FA 재수생 임찬규이니 포스트시즌 우승 경쟁팀인 SSG나 KT에 비해 한국인 선발이 매우 약합니다. 그런데 이민호나 김윤식도 올해는 어찌 된 일인지, 한해 쉬어가는 것처럼 던지니 감독도 속이 탔을 것 같습니다.그런 와중에 마치 비장의 무기처럼 준비한 이정용이 두둥탁하고 등장한 것입니다.
원래 이정용은 선발 카드가 아니었습니다. 20일 경기에서 제대한 이상영이 선발로 흔들리자 감독은 이정용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6월 25일 롯데와의 홈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2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했습니다. 7월에 기아와 3이닝 무실점, 9일 롯데와 원정에서 무참히 터지고, 월말에 KT에 4실점하면서 허상이었나 싶었으나 약간의 조정을 거쳤는지 8월 2일 키움전부터는 팬들에게 새 선발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6이닝 무실점이었습니다. 이후 기아 전에 5이닝 무실점, 삼성전에 6이닝 2실점 등을 기록하며 선발 전환 첫해를 아주 잘 보냈습니다. 내년을 기대하고 싶지만 군에 가야합니다. 군에서 선발 수업을 제대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정용이 올해 선발 등판한 13경기에서 본인은 4승 2패를 기록했으나 팀은 9승 4패로 높은 승률을 기록했습니다. 팀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선수입니다.
이정용이 선발로 등장했을 때가 엘지로서는 올 시즌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위기를 완벽한 모습으로 이겨내면서 후반기 편안하게 우승 질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용 선수 땡큐. 포스트 시즌에서도 딱 1게임만 6이닝 무실점해줬으면 합니다. 그럼 우리가 우승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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